홍주인뉴스] “오늘은 126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의 날”, 두 개의 풍경
‘예산군에서는 예산동학농민혁명공원 기념비 제막식 거행’
‘홍성군에서는 홍주동학창립식 및 홍주동학 학술대회 개최’
‘홍성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안 시급’
박종태 기자 park123@hongjuin.news
알다시피 1894년 이 땅의 민초들이 낡은 봉건제도를 혁파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그중에서 5월11일은 동학농민군이 1894년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과 최초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날이다. 일러 황토현 전투.
그렇기에 정부는 이날을 부패정치와 외세에 맞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한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지난해 첫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126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의 날을 맞아 홍주in뉴스는 거시적인 내포동학(內浦東學) 속 예산동학과 홍주동학의 의미 있는 발자취를 찾았다.
갑오년 9월 18일 해월 최시형 선생의 총기포령에 따라
덕산군 장촌면 막동, 9월 그믐 자시.
내포동학농민군들
마침내 똘똘 뭉쳐 일어났네.
보국안민, 척양척왜 깃발 아래
썩은 세상 뒤엎고 침략 일본군에 맞서 싸우러 가세.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개벽천지 새 세상 만드세
시호시호 오만년지 시호로다.
지난해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예산읍 관작리 동학공원 내 관작리 전적지 기념석에 새겨진 글귀이다.
예산군은 이날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예산읍 관작리 288-9번지)에 위치한 내포동학농민혁명기념탑 건립식을 가졌다.
이곳은 충남지역 최초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자 대승을 거둔 관작리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이번 기념탑 건립을 위해 지난해 2월 동학농민혁명기념탑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추진해왔다.
이날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회장은 “그동안 내포동학농민혁명의 재평가와 계승을 위해 예산군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조례안을 통과시키고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딛고 오늘에 이르렀다”며 “동학이 내세운 가치는 평등이었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횃불처럼 일어났다. 그러한 동학의 정신은 민주화의 원동력이 되었고 촛불로 승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동학혁명군을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하는 이유는 동학은 인간의 존엄을 하늘과 같은 존재로 귀하기 여기고, 사회부정의를 변혁하는 큰 가르침을 주는 참뜻이기 때문이다”며 “서세동점의 주범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기포한 거대한 민중이자 민족자존이다. 기념탑이 세워졌다고 동학정신이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동학인이 되어 동학적 삶을 다함께 영위하고 실천해야 올바른 계승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홍성군에서는 홍주동학의 재평가와 역사적인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작은 행사가 치러졌다. 일러 홍주동학기념사업회 창립식 & 홍주동학 학술발표대회.
이날 사단법인 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부설로 설립된 홍주동학기념사업회 창립식은 미약하지만 홍주동학의 첫 행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복익채 회장은 “충절의 땅이면서 의병의 땅인 홍주지방은 1895년과 1905년 두 차례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였던 곳이다. 당시 보수적인 양반계층과 민중들이 함께 어울려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은 홍주의병이 가지는 특징이다”며 “이러한 양반계층과 민중들이 어울릴 수 있었던 계기는 1894년 10월 28일 민관이 합작으로 동학군을 물리친 홍주성 전투일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현실적으로 인근의 예산군, 당진시, 공주시 등은 이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안을 세워 선양사업을 하고 있지만 홍성군에서는 아직 논의조차도 없는 실정이다”며 “하지만 저희 홍주동학기념사업회는 내포동학농민군과 홍주동학농민군 그리고 홍주성전투가 가지는 의미를 오늘의 가치로 되새기는 작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단법인 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2층 강의실에서 개최된 홍주동학 학술발표대회에서는 본지 전용식 총괄기자가 ‘홍양기사(洪陽紀事)에 나타난 홍주성 전투의 승리 요인 분석’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이번 학술발표대회는 사회적거리두기 상황에 맞춰 2m 이상의 거리를 두고 강의방식으로 진행됐다.
전용식 총괄기자는 “홍양기사는 남양사람인 홍건이 친우인 이승우가 홍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1894년 4월부터 12월까지의 일기인데 분량은 122면, 부록으로 난중기문과 관군 및 유회군의 군공록을 싣고 있다. 홍건은 동학농민혁명의 진압에 깊숙이 관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11월 16일 홍주영장에 발탁되었다고 각종 사료에 나와 있지만 당시 총리대신 김홍집과의 친분관계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라는 색다른 평을 내놓았다.
이어 “음력 7월초6일 이승우 목사가 장리(將吏)를 통솔하여 성첩(城堞)을 견고하게 수축하고 화포와 창을 수리하였으며, 김병돈(金秉暾)을 중군(中軍)으로, 한응준(韓應俊)을 참모로 삼아 성(城)아래 병정(兵丁)을 훈련시켜 미리 대비하는 방책을 세웠다. 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의 한응준은 한용운 선생의 아버지일 것이다”며 “참모관 한응준(韓應俊)은 병학(兵學)에 정통하고 당시의 깃발 색깔을 바꿨으며,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반년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괴로움을 겪었다”라고 군공록의 기록에 나온다고 밝혔다.
전 기자는 “홍주성 전투의 승리는 급료가 없는 아전들과 교졸들의 양식과 급료를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환미와 세전을 월급으로 내주어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마을에서 현명한 선비와 호걸들을 선출하여 인솔하게 하고, 교졸 100여 명을 뽑아 부대를 만들어 이들에게도 월급을 지급했다”고 말했다.
또한 “성 아래 4 개 마을에 명하여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어 수상한 자를 정찰하고 창고를 열어 빈곤한 자를 구제하고 거리와 시장에 방(榜)을 내걸어 패악을 행하는 자는 바로 잡아들이게 하였다. 만약 그 패거리들이 많아 잡기 어려우면 바로 달려와 보고하도록 일일이 조약을 정하는 등 민관의 마음을 결속시킨 것이 광천에서의 승전보를 일으켰고 이것이 결국은 홍주성전투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 홍양기사를 아주 쉬운 문체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이 끝나면 책으로 출판해 동학의 역사에 숨겨진 1894년 10월 28년 홍주성 전투와 홍주의병의 정신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고 말했다.
한편 홍주in뉴스 전용식 총괄기자는 네이버 지식in에 나와 있듯이 2006년 11월 우정사업본부 주최 제1회 우체국예금보험 대학(원)생 경제논문 공모전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KT문화재단 주최 논문 공모전 장려상과 향토논문공모전 장려상 2회, 농촌진흥청 주최 2017농산업경영혁신논문경진대회 우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대표저서로 R을 이용한 텍스트마이닝과 전자결제론이 있다. 박종태 기자 park123@hongjui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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